누군가의 생이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잔인했다.
어느 시점엔가 내가 정하지 않은 시간과 순간이 아닌 어느때,
내가 이 세상에서 없어진다는 선고를 받고 웃으며 지낼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무리 가족이라도 아버지의 그 순간이 나에게는 타인의 인생처럼 느꼈던 듯 하다.
설마, 그랬을리가. 회피였나보다.
그 한정된 시간과, 병으로 악화되는 몸의 변화로 옴짝달싹 하지도 못했을 그 시간을.. 아버지는 홀로 그 시간을 힘겹게 보내셨고, 어머니는 지쳐갔다.
몸에서 떨어지는 각질을 아버지는 싫어하셨고, 매번 아버지한테 잔소리하며 바디로션을 정성스레 발라 드렸다. 무좀이 있던 아버지의 발은 어느새 나뭇가지처럼 딱딱해져있고, 생기없는 나무처럼 갈라져있다. 그런 아버지의 발도 정성스레 로션을 발랐다.
아버지의 시한부소식을 듣고 울고나서야 다가왔다. 아버지의 시간이 많지 않음을.
그럼에도 아버지는 누나의 사랑과 보살핌에, 엄마의 따스한 보호막 아래, 멀리서 아버지하나만 보고 오는 장남에.. 우리 형제와 엄마는 아버지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곧 돌아가실듯했던 아버지는 생명력, 살고자하는 의지가 강하셨다.
병에 굴복하려 할때 하나님께 기도하셨고, 거동못하면 요양병원에 보내야 하니, 그러기 싫으면 이겨내시라는 거꾸로 응원에 아버지는 잘 버티셨고, 주식의 등락폭 그래프처럼 좋았다 나빴다를 반복했다. 그 시한부 시간을 받고 나서도 아버지는 그 보다 더 오래 버티셨고 이생의 끈을 튼튼히 잡고 계셨다. 든든한 나의 아버지로 버티어 주셨다.
그러나 뼈에 붙어 기생하던 암은 그런 아버지를 가만두지 않았다.
점점 세포를 잠식하면서 아버지의 살과 피를 빼앗았다. 항암치료로 인해 아버지의 몸은 늘 부어있었지만 아버지의 하체는 더욱더 약화되어고, 다리는 뼈만 만져졌다. 그런 아버지의 다리를 주무를때마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산소때문에, 내 어릴적 서운함때문에 아버지를 원망했던 그 시간들이 미안했다. 부끄러웠고, 남자로서 창피했다.
그 시점 부터 였나보다. 문뜩문뜩 눈물이 났다. 남자의 인생이, 아버지의 인생이 참 딱하고 감정이 이입되었다 점차..
어느 날, 엄마한테 전화를 받았다. 얼른 집으로 와야겠다고..
아버지가 계단에서 굴렀단다. 난 그냥 삐끗해서 다리가 풀려서 삐끗하셨나 했다.
근데, 몸에 떨어진 각질이 묻은 이불은 털겠다고 계단앞에서 그러시다가
몸에 중심을 잃고 2층에서 굴렀던거다. 그당시에는 동거인 아니면 자식역시도 면회자체가 안되는 고 위험군에 속해 (특히 코로나 이후), 아버지를 찾아보지도 못했다.
아버지 사진을 보고 너무 놀랐다. 자칫 그대로 돌아가셧을수도 있을만한 상황이었고 또 그 상황을 목격하고 처리했던 엄마의 무서움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 일이 있고난 후, 짧은 시간에 많은것이 달라졌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병원에 가는 날이 많아졌고,
그럴수록 병원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처음에는 반나절, 그 다음에는 거의 한나절, 그 다음에는 이틀, 그 다음에는 일주일..
그러다 더 이상 음식을 드시지도 못했고, 뭘 먹어도 토할것 같은 느낌에 식사를 멀리하셨다.
안먹으면 요양원 보내야 한다고 협박을 해서 겨우 회복하지만..
이미 뼈에 전이된 암은 몸의 여러곳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더 이상 씹지도 못하시고,
그러고는 입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내 집이며, 엄마도 챙겨야 하고, 대전에서 서울까지 대학원에도 가야하는 고단한 삶이었다. 틈틈히 아버지 면회가면서 말이다.
입원하시고 난 다음부터는 면회도 제한되었다. 특별관리대상자라고 해서 상주가족외엔 면회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짜증이 나고 화가났다. 친 자식이 보러가는데도 못 보고 되돌아온 날이 많았다. 만나도 몇 분 이었다.
중환자실에 누워계시면서 치료 받으시는 아버지를 만났다. 천사같은 간호사가 배려를 해 주었다. 물론 사정사정 했지만.
누워계신 아버지를 보자마자 "아이고.. 우리 임종채씨 꼴이 말이 아니네~~~" 그러고 웃었다.
아버지가 웃는다. 그러곤 "아이고.. 그러게 말이다 아들아.. 내 꼬라지가 말이 아니네.." 아버지 힘내라 응원하면서 나오는데 아버지가 손을 놓지 않는다. 들어가자마자부터 그랬다. 무서웠을거다. 남자고 월남전쟁도 치루신 분이지만, 보이지 않는 병과 싸우느라 지치셨을거다.
그러고 대전으로 가는 기차를 타려고 병원을 나서는데, 그때부터 또 눈물이 흐른다. 그래, 눈물이 많아졌다. 눈물은 참는거라 배워와서 그런지.. 꾹 꾹 눌렀는데도 참아지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을거라는 슬픔보다, 무서웠다.
아버지가 없는 세상, 그 삶,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랬더니 무서워졌다. 난 남잔줄 알았는데, 여전히 부모의 보호아래 포근한 둥지에서, 미쳐 떠나지 못한 새 새끼같았다.
일반병실에서 2달간을 또 건강하게 계시다가 어느날 갑자기 호스피스 병동으로 내려가셨다. 의사의 권고란다. 아버지는 입원하면 안되는 사람 아닌가? 할 정도로 괜찮았다. 말씀도 잘 하시고 오후의 해도 맞으시고.. 할거 없는 입원생활의 지겨움과 무료함 빼고는 우리 아버지는 중중환자가 아니라 생각했다.
호스피스로 내려가시고 난 다음부터 많은게 달라졌다. 그때부터는 정말, 드시는걸 완전히 중단할수밖에 없었고, 영양주사로 연명을 하셨다. 그러다, 어버이날이 돌아왔다. 휴일이 아닌이상 평일에 올라가 부모님을 뵙고 시간을 보내는것은 여간어려운일이 아니다. 엄마가 전화를 하셨다. 병원에서 어버이날 행사를 하는데, 자식들이 편지를 써와서 읽어드리는 이벤트라고 한다. 병실엔 4분이 계셨는데, 결국은 나 혼자 준비했다.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형과 누나한테 각각 받아서 내가 읽어드렸다. 유일하게 아버지 자식, 나만 찾아왔고 나만 그렇게 해 드렸다. 주변의 환자 가족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해한다. 그러고싶지 않아서가 아니었을 것이랴.
그 날, 담당의사, 간호사, 엄마 아버지 그리고 나, 이렇게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이 싫었다. 사진에서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이.. 현생의 사람이 아닌듯 나한테는 느껴졌고,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싫었다. 우리 아버지는 참 잘 생겼고, 멋진 사람이었으니까. 너무 낮설었다.
그렇게 버티다가.. 호스피스는 2달 유예기간이라고 한다. 그 시간동안 아무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반 병실 또는 타 병원으로 이관이 된다고 한다. 아버지는 국가유공자 신분으로 치료 및 병원에서의 비용들을 절감하기 위해 협력병원에 계셨던 것이었다. 호스피스의 기간이 끝난 다음부터는 방법이 없었다. 한번의 배려인듯 싶었다.
다른 병원으로 아버지가 옮겨졌다.
그러고 10일 가량 지났고, 엄마의 울음 전화로 그 시간을 맞이했다. 그것도 낮설다. 강하고 고집스런 엄마의 흐느낌이란... 너무 낮설었다.
불과 며칠 전에, 아버지 보러 한번 들르라는 엄마의 말에, 찾아갔다. 아버지는 그 때부터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내가 가서 아버지~ 불러도, 아버지를 만져도 기척없이 가쁜 숨만 쉬었다. 그리고 그 날,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내가 왔다고 이래저래 뭐라뭐라 쉼 없이 본인들 얘기하느라 내 시간을 주지 않았떤 엄마와 누나를, 짜증섞인 말투로 나가있으라 쫒아냈다. 아버지와 할 말이 있다고.
별로 할 말은 없었다 사실. 우리 부자는 이미 대화를 많이 했다. 추억도 하고, 아쉬움도 말했으며, 어떻게 살 거라는 희망적인 말 부터, 본인이 돌아가시고 나면 엄마의 거취등.. 딱히 새롭게 할 말은 없었다. 나는 사랑해요 임종채씨를 말하는 막내라 그런지.. 새로울 말이 없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이라고 말씀하신게 있었다. 너는 꼭 교회 다니고 하나님 믿었으면 좋겠다 라고. 그 손을 잡고 말씀드렸다. 거짓말 하기는 싫어서, 나는 사람을 믿는게 아니라 이미 내 마음에 있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그래서 그분께 기도했고, 아버지를 위한 기도를 해 드리겠다고.. 아버지가 듣지 못하실까봐, 아버지의 귀에 속삭이면서 기도를 드렸다. 참 오랫만에 통성기도였다. 또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아버지의 마지막이... 손에 잡히는 기분이 든다.
미동도 없으셨던 아버지의 감은 눈가에서 눈물이 흘렀다. 참을수 없었다. 그 슬픔을. 그리고 또 한참을 울었다. 아버지 고맙고 감사했다고.
그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세 자식들의 마지막 만남을위해 연장했던 연명장치에서는 이미 비음 소리가 났다. 그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얼음처럼 차가운 차가움이 아닌, 따스함이 사라진 차가움. 어쩔줄을 몰랐다. 그냥 나오는 슬픔과 눈물만이 앞을 가린다.
그 시간을 지나, 우리 형제는 아버지의 영정사진 앞에서 환하게 웃고, V 하며 사진을 찍었다.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한테도 그랬다. 아버지 돌아가시면 영정 앞에서 밝게 웃고 사진찍을거라고. 정말 그랬다 우리는. 그 모습이, 우리의 가정은 참 행복하고 좋았다.
아버지의 마지막도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과 더불어, 아버지의 아픔없는, 할아버지를 만날 아버지를 생각하며 우리는 행복을 빌어줬고, 감사해 했다.
나는,
아직 아버지가 그립지도, 꿈에 나타나지도 않는다. 아버지가 꿈에 나타날까 무섭다. 밝고 행복한 아버지라면 울며 달려가 꽉 안아드릴텐데, 돌아가시고 나타난 딱 한번의 꿈에서, 아버지는 몸의 모든 구멍으로부터 배설을 하시고 고통스러운 소리와 표정으로 꿈에서 나가셨다. 그러고서는 다시 꿈을 꾸지 않는다. 아버지가 아직, 그립지 않다.
나를 뺀 모든 가족이, 아버지와의 더할날위없는 행복함을 꿈에서 본다고 한다. 왜 나만...
아마 나를 많이 사랑하셨기에 내 꿈에서는 기대고 싶었을것이리라.
아버지의 미움때문이 아니라
나는 아직, 아버지를 놓고 있지 못하는 듯 하기도 하다. 아직 철이 덜 들었거나.... 48세가 되었고, 나도 자식을 키우는 가장인데도 말이다.
孝,
그 시작과 끝이란건 없다.
단지 그건 내 삶 중에 떨어뜨릴수 없는 인생과 같은 것인듯 하다.
내가 주는 孝 만 있는게 아니라 내가 받는 孝도 있다. 그래서 그냥. 그건 인생 그 자체다.
부모를 봉양해야 孝가 아니라,
부모와 시간을 같이하는 그 일상, 내 아이들과 시간을 같이 하는 그 자체가 孝 인듯 하다.
아직 나는 효 를 잘 모른다.
그냥 아는건,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남들보다 더 아끼고 조심하고, 배려하고, 응원해주며 사랑해주고 서로 사랑하는게, 가족외의 것들에서 편안한 안식처와 도피처가 되는게. 그게 결국은 부모로부터,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인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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