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거 없는 자존심에
아버지가, 어머니가 물어오는 걱정스런 안부에 짜증이 났다.
주둥이로는 잘 살고 있어요.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했다.
끊임없는 반복되는 질문에 가슴이 막혀 터질것만 같았다.
늘 나는 막내였고 물가에 내 놓자니 도저히 마음을 놓을수 없는
제일 손이 많이가고 안타까운 자식이었으리라.
군대에서였다.
나는 멋진 군인이 되어보고 싶었다. 멍청한 학창시절 모두를 덮고 싶었다.
새롭게 마음다짐을 했다.
이병이던 어느날, 상병의 선임과 밝은 오후에 보초를 섰다.
작고 외소하고 말투도 어눌했던 나를 보기좋게 갈구던 선임이었다.
저 멀리서 군용차가 온다. 누가 내린다. 나한테 온다. 그리고 말을 건다 나한테.
"아버지 잘 계시냐?" 그러고 몇마디 하고 간다. 견장을 보니, 사령부 상사계급.. 아마도 기억엔 행보관이었던듯 싶다. 의아했다. 누구지?
그때부터 내 군 생활이 꼬여버렸다. 낙하산이라는 꼬리표로 병장되기 전 까지
계속 그게 나를 괴롭혔다. 나를 보는 시선이 "저새끼는 함부로 건들면 안돼" 분위기다.
군 생활 내내, 나를 찾아오는 가족이 싫었다. 밤새 일하다가 면회온 엄마는 면회장소 탁자에서 엎드려 주무셨고, 누나는 나 좋으라고 개를 끌고, 지하철을 타고 왔단다. 아버지는 계속,
딱한아들 보는 눈빛에.. 부르스타와 냄비등 각종의 것들을 가지고 온 가족이, 창피했다.
체육대회 후 외박이벤트에서 아버지와 형이 나를 데리고 집으로 갔다. 가고 오는 내내 아무말도 안했다. 그 일 있기전에 바로 알았기 때문이다. 내 군생활의 오류시점이 어디였는지.
아들의 강인함을 지켜보는 대신에 보호를 선택했다 아버지는.
작은아버지를 통해, 쇠위말하는 뒷돈을 주었다는 거다. 그래서 그렇게 빠졌단다.
너무나도 싫었다.
내 인생도 내 생각대로 꾸밀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다. 지금 이 글을쓰는 시간에도
정말 그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을 키우는 지금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테지만 적어도 그 마음은 충분하게 이해가 된다. 그 사랑이.
나는 그랬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러지 못했다. 자기 무릎에서 죽어있던 아이였고,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살려달라 애원했다던, 그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나란들 그 입장이면 달랐을까..
아버지의 암이 재발하면서부터 우리집은 또 전쟁터였다.
누나와 아버지의 싸움이 잦았다. 그런데 누나가 그랬다. 누나는 지금 아버지랑 풀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거 같다고. 왜 그랬냐고 다 물어보고 다 대답을 들을거라고. 응원하진 못했지만 말리진 않았다. 누나도 나름대로 상처가 많았으니까. 아버지의 우유부단함, 자기 가족보다는 자기 형제들의 우애와 사랑을 더 중시하던 그런 분. 자식의 허물을 숨겨주지 않고 형제들로부터 자기가 위안을 받으려 했던 아버지. (그러나, 나였어도 아버지와 같았을 충격이긴 했다)
누나는, 그런 아버지한테 듣고 싶었나보다. "아빠, 나한테 왜 그랬어요?"
누나는, 세상 제일 착하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딸이었다. 누나랑 싸우면서도 아버지는
누나를 너무 사랑했다. 누나도 안다. 그래서 오해없이 아버지의 마지막을 긴장없고 미움없는 효를 전하고 싶었나보다.
아버지는 암이 재발하고 더욱더 바빠졌다.
시간이 얼마 없다는 말로, 많은걸 준비하려 하셨다. 그래서 무리하면서도 경제활동을 하셨나보다.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이 있었다. 아버지가 죽으면 할아버지 옆에 묻어달라 그러셨다.
그걸 2015년인가부터, 2023년 아버지가 더이상 거동이 힘드실때까지 고향에 있는 할아버지 산소에 가셨다. 물론 몸이 성하지 않은 아버지를 모셨고, 매번 그 짧은 시간에 많은 일들을 하셨다. 실제 몸을 쓰는 일로.. 쉼 없이 산소를 뜯고 묻고, 허물고 다시 쌓고 했다.
내가 사업으로 몸과 마음이 상했을때에도 아버지는.. 하셨다.
혼자가겠다고 하시는걸 차마 그렇게는 못하고.. 정말 두세번을 빼고는 매 번 시간을 내 모셨다. 산소일을 하고나서는 진이 다 빠졌다. 몸쓰는 일도 그렇고, 나 역시 허리이상으로 한쪽 다리전체가 저리고 쑤시는, 공황장애까지 생겨 힘들었던 그 시기였다.
우리집에서는 단호히 아버지의 산소행을 거부했다. 불효가 아니라 효를 실천하려, 아버지의 안위를 걱정한 대의다. 누나도 형도 동의하고, 엄마도 나한테 부탁을 했다. 아버지 생각하는 마음은 잘 알지만,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모시고가지 말라고. 그래서 그랬다.
그랬더니 혼자가신다. 독산동에서 2시간을 지하철을 타고 고속버스터미널에가고, 거기서 멀미를 참으며 3시간을 달려 무주에 도착한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산소로 간다. 그러고 종일 강도높은 산소일을 하다가 또 그 시간을 거쳐 서울로 돌아오신다. 신경쓰이고 짜증이 났다.
그러다 문뜩...
그래.. 마지막 준비하면서 제일 하고싶다고 하시는데 말린다고 그게 효 인가 싶었다. 그래서 가족을 설득했다. 내가 아버지라도.. 마지막은 하고 싶은거 할거 같다고. 내가 몸이 불편해도 하겠다해서 같이 해 드렸다. 어느순간 아버지와 말도 섞지 않았다. 일이 고되기도 했고.. 쉼 없이 휴식도 없이 일 부리는 아버지가 미웠다. 제일 미웠던건, 기차역에 모셔다 드리고 돌아설때쯤 늘 내 차에 돈을 던져놓고 가신다. 너무 화가났다. 짜증나고 싫었다.
인부를 쓰자고 그렇게 말해도 듣지 않고, 그 돈을 나한테 던지고 가신다. (내가 돈 안받고 뿌리치고 할까봐 차에 던져 넣었다라는 표현) 쌍욕이 나왔다. 매번 그랬다. 그렇게 아끼는 막내아들이.. 몸과 맘이 너무 아픈데도.. 자기 하고싶은일 한다는 생각에 너무 분했다. 미웠고.
아버지의 말은 나한테는 상처였고 슬픔이었다. 매번 산소일을 하고나서는 그러셨다.
"니가 관리해야 하니까."
웃으시면서 그런다. "아버지랑 이런 추억이라도 만들수 있으니까 너는 행복한줄 알아 인마"
듣기 싫었다. 형도 있고 누나도 있는데 왜 내가. 부모로부터 제대로된 교육의 복리후생도 받아보지 못한 내가 왜 누나랑 형 말고 내가 그 효를 다해야 하는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언젠가 아버지한테 그랬다. 서러워서 그랬는지.. 말 하다가 울어버렸다. 40이 넘고 나서.
막내가 아버지랑 하고 싶은건 두세가지가 전부라고. 하나는, 나랑 여행가기. 둘째는, 나랑 목욕탕 가기 (아버지랑 단 한번도 목욕탕을 가 본 적이 없다), 아버지한테 술 한잔 받아보기.
우리집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다. 장로님 권사님의 부모님이시고, 가정보다 교회를 더 중시하던 분들이시다. 그런분들에게 술마시고 담배피는 나는 거의 막나가는 날라리 자식이었다. 그런 아버지한테 술 한잔 따라주세요 한거다. 이런 미친놈이.. 하셨을거다 속으로는..
어느날 아버지가 집에서, 기념일인지 어느때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정말,
술을 사 오셔서 술을 따라주셨다. 통쾌했고 재밌었고 즐거웠고 너무 행복했다. 아버지의 말씀이 더 그랬다.
"그래, 우리 아들이 그렇게 원했으니 아버지가 한잔 주마" 그러면서 주셨다.
그날.... 이었나보다. 내가 울었던 날이.
그러면서 아버지와 말을 많이 했다. 말하지 못했던 내 아픈 어릴적 얘기, 군대시절의 좌절감, 적절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받지 못함에 대한 서운함. 내 고단함. 똑같은 남자로서, 가정을 꾸리는 가장으로서의 동질감으로 등등..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그냥 묵묵히 받아들이셨다.
왜 하고픈 말이 없었겠나.. 그래도 아버지는 왜 그랬는지 설명해주셨고, 자기의 소홀함 미안함 다 표현해 주셨다.
고마웠다.
어느날에, 술한잔 거하게 동료들과 나누고 집으로 돌아오는길에 전화를 받았다.
매형이다. 내가 대전에 살고 있다보니 평소에는 대부분의 아버지를 매형이 모셨다.
고맙고 고마운 분이다.
오랫만에 전화를 하셨길래 반가이 받았다.
그날이 아버지가 항암치료 받으시던 한달에 한번있던 그 날이었다.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모시고 거의 하루종일을 고단하게 보내시고 전화를 주셨다.
병원에서의 일 모두를 상세히 말씀해 주셨다. 저번달과 뭐가 달라졌고 앞으로는 무슨 과정인지 등등... 매번 그러셨던 것처럼.
그러다 마지막에 매형이 그런다.
이번에 수치가 많이 올라갔고, 의사가 하는 말이 뼈에 전이가 진행돼서.. 더 손쓸 방법이 없다고.. 길어야 6개월 남으신거 같다고, 마음에 준비를 천천히 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는 아무말 못했다. 술기운에 기분좋게 받았다가 머리가 띵 했다.
우리 아버지는 암 환자였다. 암이란 병이 쉽게 없어지는 병이 아니란것 쯤으로만 이해했지,
실제 연명기간을 듣고나니 혼란스럽고 어찌할지를 몰랐다.
서로의 대화에 정적만 흐르다가.
눈물이 나더니, 주저 앉았다. 그러고는 또 무너졌다. 길바닥에 앉아서 울었다.
난생처음 소리도 안나는 그 울음을 울게 될 줄이야.
허무하고 허무했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아버지와의 시간이 6개월이 전부라는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너무 불쌍했고
그 고단함에 미안했다.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자주 표현했지만 부족했나 싶다.
추스르고 집에 걸어서 돌아가는데도 울음이 멈추질 않았다.
웬걸... 몸과 맘을 추스르고 집에 들어갔다. 울음을 멈추고, 티비를 멍하게 보다보니
"눈이 부시게" 라는 드라마가 마지막 편인가가 방영중이다.
아빠(안내상)이 눈을 쓸고 있던 엄마(김혜자)한테 그런다.
"아드님 한 번도 안 넘어졌다더라. 눈 오는 날에 한 번도 넘어진 적 없다더라"라며 눈물을 흘렸고 엄마는 "다행이다" 하며 웃는다. 그리고 아내한테 그런다. "엄마였다. 평생 내 앞에 눈을 쓸어준 사람, 엄마였다"
또 울었다. 왜 하필 그날에 그런 드라마의 종편이 방영돼서...
밤새 눈물을 주체할수가 없었다.
늘 내 생각과 기준에서 아버지를 미워했고 원망만 했다.
나도 같은 남자고, 가장이며 아이들의 아버지 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내 아버지는 깊게 이해하지 못했고, 가정형편도 모르는 철없는 아들이 사주지 않은 장난감 때문에 아빠한테 서운해하고 미워하는것처럼, 그렇게도 철이 없었던 아들이었나보다.
그렇게 효, 孝는 알면 알수록 어렵고도 고단하며 이해하기 쉽지 않은 과정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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