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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

7. 모욕하는 삶을 살지 않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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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맞춤법이 틀린 글이 올라왔다.

그러자 그 아래에 '극혐'이라는 댓글이 잔뜩 달렸다.

극혐이라는 건 극도로 혐오스럽다는 뜻인데

나는 맞춤법을 틀리는 게 왜 극도로 혐오스러운 일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맞춤법을 틀리는 것으로 세종대왕을 모욕하겠다는 저의를 읽을 수도 없고,

모른다고 해도 그게 혐오의 범위에 들어갈 정도로 잘못한 걸까?

극혐, 개저씨, 기레기, 설명충, 급식충, 유족충, 맘충, 보슬아치, 한남충, 등

수많은 모욕과 혐오를 담은 단어들이 일상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의미는 우리가 서로를 너무 쉽게 혐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혐오주의의 원인을 주로 중산층 붕괴로 이야기한다.

지위에 불안을 느끼는 이들이 누군가를 내몰아

자신의 사회, 경제적 지위를 되찾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전부일까.

그렇게만 해석하기엔 그 대상이 무차별적이고 광범위하다.

나만 하더라도, 대한민국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김치녀로 묶이고,

결혼해서 전업주부를 하면 취집충, 아기를 낳으면 맘충,

설명하려 들면 설명충, 진지하면 진지충이 왼다.

벌레가 아닌 사람으로 살기 참 어렵다.

이러한 일상적 혐오에 대해 <모멸감>의 저자 김찬호 교수는

웬만큼 잘나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그 공허를 채울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타인에 대한 모멸이라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희미해진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고 열패감을 보상받기 위해,

얄팍한 우월감을 맛보기 위해 타인을 모멸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찌질한가.

열패감에 젖은 이들은 '혐오'로 맺어진 단단한 유대 속에서

서로의 찌질함을 감추고, 실제로 경험한 것이 아니라 해도

원하는 정보만을 소비하며 대상에 대한 뒤틀린 이미지를 강화한다.

그리고 그 혐오에 모멸감을 느낀 이들은

다시 혐오를 미러링(Mirroring) 하고, 복제해간다.

그 결과 인터넷에선 누가 더 혐오스러운가에 대한

끝없는 경쟁이 펼쳐진다.

그런데 이 혐오 경쟁 끝에 '나와 다른 모든 이들은 혐오스럽다'

라는 결론을 내린다면 그땐 속이 후련할까?

혐오스러운 인간들이 도처에 널려있다는 불신과

삐끗하면 나 역시 비웃음과 혐오의 대상이 된다는 긴장 속에서

우리는 조금 더 조심스럽고 조금 더 날카로워질 뿐.

단언컨대,

서로에게 가해자가 되는 세상에선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 남을 모욕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인 이들을

'루저'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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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 엘리베이터 안에서

엄마에게 안겨있던 아기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아기 엄마는 당황해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그러면 안 된다며 아기를 달랬고, 연신 눈치를 보았다.

난 그녀에게 "괜찮아요" 라고 말했다.

 

 

나의 "괜찮아요"는 '나는 당신을 함부로 모욕하지 않아요'라는 의미였다.

정말, 괜찮아요.

 

[출처] 마음의 숲,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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