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운동권에 있었다는 어느 분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는 명문대를 졸업했지만 운동권 출신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제대로 된 직장을 잡지 못했다.
그런 그는 자본주의를 혐오했는데,
이렇게 불합리한 구조에선 일할 수 없다고 말하며
언제부턴가는 일자리를 구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마흔을 넘긴 나이까지도 일을 하지 않았고,
그 결과 모든 생활비는 청소 일을 하는 어머니의 몫이 되었다.
누가 보더라도, 이 사람의 논리는 허점투성이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사회적 구조를 비난하면서도
자신은 어머니를 착취하고 있으니 말이다.
주변 사람들은 일할 시도조차 하지 않는 그를 이해할 수 없어 했고,
그의 어머니를 불쌍하게 여겼다.
대체 무엇이 그를 이토록 이해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짐작하건대, 당시 명문대를 나왔던 그는
스스로에 대한 기대도 이상도 높았을 거다.
하지만 운동권이었다는 이유로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현실에서
얼마나 많은 무력감과 좌절감을 느껴야 했을까.
거기다 경제적 독립에 실패했다는 사실은 그에게 수치심이 되었을 것이고
그가 품었던 자아 이상에 치명적인 손상이 가해졌을 테다.
자신에 대한 수치심, 무가치함은
사람이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는 감정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이 감정을 숨기고자
냉소를 무장하고, 문제의 원인을 외부의 탓으로 돌리며
변명 뒤에서 자신을 보호한다.
그런데 문제는 변명으론 자신을 지킬수 없다는 데 있다.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변명에는 사실 그 자신도 속지 않기 때문이다.
곁으로 아닌 척해도 무력감과 수치심은 여전히 내면에 처리되지 못한 채 남아있는 것이다.
소설가 김형경은 <<사람풍경>>에서
사랑의 반대말이 증오나 분노가 아니라 무관심이듯,
생의 반대말은 죽음이나 퇴행이 아니라 방어의식이라 이야기했다.
방어의식은 사람을 영원히 자기 삶 바깥에서 서성이게 한다.
그 역시 오랫동안 삶의 바깥에서 서성이며 맴돌았다.
자신을 초라하게 하는 현실과 마주하며 무력감과 수치심을 감당할 바에는
차라리 동네의 고상한 레지스탕스가 되는 편이 나을 거라 여겼을 수 있고,
부조리한 세상에 상처받는 것이 두려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더 이상 그 과거에 묶여 인생 전체를 소진해서는 안된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자책과 원망을 소거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투명하게 재평가해야 한다.
대학 시절,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썼던
자신의 노력에 자부심을 느껴야 하고,
좌절된 욕구는 어쩔 수 없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한심하고 부끄러워할 건
좋은 직장에 다니지 못하는 거나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기대했던 모습은 아닐지라도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는 걸 견뎌야 할지라도
변명을 덜어낸 진짜 자기 자신과 마주하자.
그리고 그 마주 봄 끝에
가장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하는 데 있다.
"난 너무 한심해." --> "아냐, 다 남 탓이야."
공격방향 : Inside 공격방향 : Outside
중요한 건, 자기 내면의 분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출처] 마음의 숲,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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